재벌2세가 경영을 하면 기업이 쇠퇴한다?
아버지 (故)이병철의 삼성그룹을 물려받은 3남 이건희 회장은 아버지가 평생 삼성에서 벌어온 매출의 두 배 이상을 단 1년의 순이익으로 달성해버린다. '신경영'선포 이후, 1992년에 2,300억원이던 순이익이 10년만인 2002년에는 15조원으로 66배 성장했다. 시가총액은 3조 6,000억원에서 75조원으로 급상승했다. 이익은 상장되어 있는 기업들을 다합한 것의 61%를 차지했다. 2002년 한국 경제 전체에서 삼성그룹이 차지하는 비중은 23%다. 같은 기간 삼성의 브랜드가치는 108억 4,600만 달러로 세계에서 가장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다. 반도체, 평면TV, 휴대폰 등 많은 제품군에서 세계1등 제품을 만들어냈다. 이 대단한 수치는 창업자가 만들어 낸 수치가 아니다. 재벌 2세 이건희 회장이 이루어 낸 리더쉽의 결과물이며 업적이다.

일본의 소니에게 복수하다, 소니를 무릎 꿇리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일본의 소니사는 절대로 다른 회사의 제휴제의를 받지 않기로 유명했다. 소니의 콧대는 대단히 높아서 한 번은 이런일이 있었다. 삼성측에서 제휴를 위해서 소니의 일본 본사를 찾아갔는데, 소니측에서는 삼성측 손님을 2시간이나 기다리게 만들었고, 비즈니스도 별 소득이 없었다.
하지만 이후 삼성은 눈부시게 성장했고, 나중에는 오히려 소니를 앞지르는 사태가 발생했다. 소니는 역사상 처음으로 다른 기업에 손을 내밀었고, 그 상대가 바로 삼성전자였다. 이 때, 소니 직원이 삼성전자 방문을 위해 한국을 찾았을 때, 삼성 역시 소니측 손님을 2시간 정도 기다리게 만들며 통쾌한 복수를 해줬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한 때, 삼성전자는 가전왕국인 일본의 전자회사 상위 10개를 합친 것 보다도 크다는 말을 들을만큼 소니에게는 무서운 존재였다.

안 되는거 붙잡고 있지말고, 처음부터 다시! 500억 어치 제품을 불싸른 사건!
사용자 삽입 이미지
현재는 유럽 등 서구에서도 명품으로 인정받는 삼성의 애니콜이지만, 한 때 그 불량률이 40~50%를 육박할 정도로 품질에 말썽이 많았다. 반도체 이후, 삼성이 먹고 살 산업으로 휴대폰 산업을 생각하고 있던 이건희 회장은 이것을 그냥 두고 넘어갈리 없었다.
1995년 봄. 삼성전자의 제조공장이 있는 구미의 사업장에서는 2천명의 임직원이 운동장에 줄을 서 있고, 곧 비가 올 것 같은 우울한 분위기 아래, 휴대폰과 팩스 등 시가 500억원 어치의 제품들이 고객의 손에도 가보지 못하고 화형식을 당하고 만다. 이건희 회장의 강력한 메세지가 담긴 지시였다. 직원들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말도 하지 못했고, 이후, 삼성전자의 전자제품, 특히 휴대폰의 품질은 날이갈수록 상승해, 2002년도에는 1년 동안, 단일 제품으로는 700만대나 국내 판매를 소화하는 기염을 토해내게 된다. 하자가 있는 제품은 팔 수 없고, 제품에 혼과 문화가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이건희 회장의 마인드가 고객들에게 그 대로 맞아떨어 진 것이다.

출퇴근 7.4제 혁신
출퇴근 7.4제란 오전 7시에 출근을 하여, 오후 4시에 퇴근을 하자는 이건희 회장의 제안이다. 이것은 회장의 직원들에 대한 배려와, 기업이 조금이라도 사회적 배려를 해야한다는 발상에서 시작된 것이다. 직원들은 오전 일찍 출근해서 남들보다 몇 시간 빨리 퇴근하고, 오후 4시에 퇴근하면 꽤 많은 문화생활이나 자기개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이회장의 생각이였다. 그리고 삼성 식구가 10만명이 넘게 되었는데, 이 숫자라도 한 두시간 빨리 출근하고, 한 두시간 늦게 퇴근하면, 조금이나마 출퇴근 교통지옥을 풀어줄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건희 회장의 '용인술'
사용자 삽입 이미지
떠난 사람도 돌아오면 과감히 다시 일 할 기회를 준다.
'믿지 못하면 쓰지말고, 일단 썼으면 무조건 믿어라.' 이건희 회장의 용인술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철학이며, 널리 알려져 있는 말이다. 과거 윤종용 부회장이 삼성을 등지고 현대로 떠난 적 있다. 이후, VCR 사업을 밀고 나가야 할 때, 꼭 필요한 사람은 윤종용 상무라며 다시 삼성으로 데리고 와서 VCR 사업에 관한 모든 책임을 주었다. 이후 윤 부회장의 노력으로 적자에 허덕이던 VCR부문의 사업궤도가 정상을 되찾았고, IMF 라는 국가 위기가 도래했을 때는, 윤 부회장의 과감한 구조조정으로 수 많은 기업 중 삼성이 별 탈 없이 건재할 수 있었다. 이건희 회장의 용병술이 빛을 발한 것이다.
남궁석 상무는 자신의 경영 실적이 악화되자, 너무나 힘들어했다. 그래서 남궁 상무는 당시 이건희 부회장을 찾아가서 미국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말했다. 가서 뭐 할거냐는 이건희 회장의 질문에, 영어 공부하고 오겠다는 말을 했고, 이건희 회장은 '사람 공부 많이 하고 오라'는 말로 남궁상무를 유학길로 보냈다. 2년여의 유학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남궁상무에게 이건희 회장은 의료기기 사업 파트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지만, 남궁상무는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현대전자로 자리를 옮기고 만다. 어지간한 그릇이 아니라면, 보통 CEO들은 남궁상무를 다시는 만나지 않았겠지만, 이건희 회장은 삼성 SDS 사장을 해달라고 남궁석 상무를 다시 호출한다. 남궁석 상무에게 같이 일해보자고 찾아간 자리에서 이회장은 이렇게 말한다.
"위에 있던 사람이 떠나가면, 아래있던 사람들은 자연히 그 사람을 펌하하고 뒤에서 욕을 하게 마련인데, 남궁석 상무가 자리를 비웠던 5년 동안 그 누구도 남궁 상무를 욕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한 현대에서 들려오는 잡음도 없었다. 같이 일해보자."

'다재다능'하고 '박학다식'한 지성인이며, 왕성한 호기심을 가진사람
이건희 회장은 일본에서도 도쿄대, 게이오대와 함께 초일류명문대학 중 하나인 와세다대학교 정치경제학과 출신이다. 학교만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 없지만, 당시 이 정도의 학교에 입학할 정도라면 대단한 지성인임에 틀림이 없다. 그는 사물에 호기심이 많고, 많은 지식을 적재적소에 활용할 줄 아는 사람으로서 그가 30대에 故이병철 회장도 반대한 반도체 사업을 추진할 때 했던 말이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리는 젓가락 문화권이어서 손재주가 좋고, 주거 생활 자체가 신발을 벗고 생활하는 등 청결을 중시한다. 이런 문화는 반도체 생산에 아주 적합하다. 미세한 작업이 요구되고 먼지 하나라도 있으면 안되는, 고도의 청정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공정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사실 일본과 큰 차이가 없지만 내가 착안한 것은 식생활 문화였다. 우리는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숟가락을 사용한다. 찌개와 탕을 먹기위해서다. 밥상 한 가운데 찌개나 탕을 놓고 공동으로 식사한다. 그것은 결국 팀워크가 좋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 점에서 일본과 비교해 우리에게 강점이 있다고 보았다."
         
- 이건희 에세이 中

이미 반도체 1위 국이 된 지금이야 별거 아닌 말일지 몰라도, 당시로서는 대단한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그는 회의스타일도 특이했다. 회의 중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경청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다가 회의가 끝날 즈음에 자신이 정리했던 것을 줄줄이 지적하여 회의 참석자들을 곤란에 빠뜨린다. 그리고 그는 오랜 기간 엔지니어로서도 활동을 했다. 실제로 그의 자택 지하에는 개인 집무실이 있는데, 다른것이 아니라, 온갖 가전제품의 시체가 널부러져 있는 그 만의 연구실이다. 실제로 거기에서 삼성 제품들의 많은 아이디어가 탄생했다. 이회장은 음악광이여서, 소리에 매우 민감했다. 삼성의 질 좋은 사운드 기기는 이회장의 높은 안목덕분에 탄생한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뉴욕 타임즈스퀘어

한국경제의 1/4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이 거대한 기업집단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위험하다고 생각하기는 싫다. 그저 난 다른 것 다 떠나서 리더로서의 이건희 회장의 선견지명과 리더쉽이 멋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능력도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본받고 싶다. 한국에는 이런 기업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삼성이 세계시장에서 더욱더 그 이름에 빛을 냈으면 좋겠다. 더불어 한국의 위상도 더 올라가길 바라며..